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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미국생활

(소소한일상/미국생활)두려움에서 익숙함이 되기까지, 나의 영어정복(?) 이야기

by art therapist (아트) 2020. 9. 5.

 

 

 

Photo by Amador Loureiro on Unsplash

 

 

만 23살에 미국에 공부하러 왔지만 사실 중고등학교 때 전 영포자 (영어를 포기한 자)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영어의 주어와 동사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와중에 대학을 아동학과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지고 특수교육과 심리학이 발전된 미국에서 제대로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영어는 제 삶에서 진정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엉덩이 붙이고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은 쉬웠지만, 사실 언어는 그렇게 해서 늘지 않는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아무리 대학교 때부터 영어 공부를 열심히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토플을 위한 영어공부가 잘 될 리 만무했고, 또 워낙에 성격이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 회화학원에 들어가서도 입 다물고 있을 때가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젤 아까운 돈..) 그래서 아예 나를 영어를 쓰지 않고는 살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언어연수를 왔으나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듣기만 좀 나아졌을 뿐.

 

지금 보면 언어는 용기 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하더라고요. 자신이 틀리던 말던 일단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다 지르고 보는 사람들이 훨씬 빨리 배웠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누가 말 시킬까 봐 도망 다니고 완벽한 문장이 아니면  입 밖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격은 언어를 배우기 참 힘듭니다. 그러니 미국에 갔다고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도서관에 틀어박혀 토플 시험공부만 미친 듯이 한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시험엔 패스해서 학교는 들어갔으나, 토론과 발표를 밥먹듯이 하는 학교 수업에 겁먹고 질려버린 저는 특수교육과 심리학 공부를 준비하던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마침 그때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지요. 결혼을 하고 나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진짜 하고 싶었던 미술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고 큰딸 3개월 때부터 근처 전문대학부터 시작해서 미술공부를 했습니다. 심리적으론 제 영어 실력으론 특수교육이나 심리학 공부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4년제 편입 후 미술 대학원 또 상담심리 대학원까지 장장 한 15년을 공부만 한 것 같아요. (그 중간 중간 둘째와 셋째를 낳아서 키우느라 더 오래 걸린 것 같아요. ^^) 그렇게 15년이나 학교를 다녔지만, 사실 제 영어는 생각보다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미술대학은 사실 다른 수업과 달리 말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고, 또 하나같이 저 같은 사람들만 모여있어서, 다들  조용히 그림 그리는 걸 선호하는 학생들이 많아 말을 할 기회가 많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영어가 일상 회화 수준에 항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술대학원을 마칠 때쯤 미술 상담 심리대학원에 지원을 했고 덜커덕 붙었습니다. 사실 전 영어로 일상생활 대화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지금은 상담대학원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큰 착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간 첫 수업, 속으로 “ 망했다. 이걸 어쩌나.. 못한다고 물릴 수도 없고..” 하며 절망하고 후회했습니다. 

 

미국은 일반 수업 자체도 질문, 토론과 대화가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상담대학원이니 얼마나 더 했을까요. 매수 업 시간마다 교수님에게 질문을 해대고 또 토론하는 분위기가 마치 경매 시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고, 저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 도대체 언제 끼어들고 언제 질문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 말고는 거의 다 영어가 모국어인 그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던 것 갔습니다. 사실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냥 그건 저의 자격지심이었던 것이지요. 

 

다행히 함께 대학원에 합격한 동기 중에 저희 동네 근처에 사는  미국 아주머니가 있어서, 같이 카풀을 하며 학교를 다니면서 그분이 저를 많이 격려해주고 도와줬습니다. 매 수업마다 발표와 토론은 어찌 그리 많은지.. 빈속으로 가지 않으면 항상 배가 아플 정도로 긴장하며 그렇게 그렇게 4년을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겨우 다녔습니다. 또 여전히 가장 조용하고 말없는 학생으로. 

그리고 대학원 졸업을 위한 논문과 실습을 하면서 정말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저를 자책했습니다. " 미쳤지 미쳤어.. 괜히 왜 상담은 한다고 해가지고.. 내 실력에 웬 논문이냐."  그리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혹여라도 후에 내가 박사과정을 하겠다고 정신 나간 소릴 하면 꼭 말려달라고요.  영어 논문을 쓸 때 당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거의 좀비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수업도 논문도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었지만  졸업하려면 실습을 해야 했고 실습은 그야말로 저에게 더 큰 난관이었습니다. 주어진 과제를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쌍방향 간의 깊은 대화를 해야 하는 실습이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습분야 중에 고르고 골라 제가 그나마 익숙한 초등학생 연령으로 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선생님들과 부모들과도 컨설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저의 두려움은 점점 커졌습니다.

 

정말 어찌어찌해서 처음 발령받은 학교에 가서 처음 부모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기던 때가 생각납니다. 너무 긴장해서 말이 꼬일까 봐 일부러 제가 할 말을 종이에다 다 적어 놓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읽는 것이 너무 떨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평소에도 전화영어 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상대의 표정도 입모양도 안 보이는 전화영어는 훨씬 더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담 선생님의  주 역할은 전화를 받고 전화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선생님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이며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을 관찰하고, 부모랑 스케줄을 정하고 부모 상담하고 또 때로는 부모교육 수업을 이끌던 모든 순간들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또 일 년을 또 징징거리며 실습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그때도  미국에 온 지 17-18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요. 저는 그전까지 미국에 있는 한국사회에 살았지요. 가끔 만나는 미국 사람들과 회화를 할 정도는 되었지만, 저는 늘 집에서 아이들과 한국말을 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TV를 보았습니다. 실습을 시작하면서 하루 종일 영어로 말하고 읽고 쓰고 하는 저를 보며, 이제 미국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학교를 가게 돼서 영어로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이 떨리고 걱정이 되던 일들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이 된 이후에도 1-2년 더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4년째 접어든 지금 겨우 익숙해져 가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이제 곧 줌으로 미팅을 시작해야 함에도 아무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뻔뻔한 저를 보았거든요.^^

 

여전히 저의 영어는 불완전합니다. 17년 전  제가 영어책을 떠듬떠듬 읽어주며 영어를 가르쳐주던 우리 큰딸은 이젠 엄마 발음이 너무 후지다며 구박입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럴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내 영어 실력에 개의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4년쯤 하다 보니 제가 일할 때 쓰는 영어도 쓰는 용어나 문장이 거기서 거기더라고요. 사실 아직도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반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워낙 욕도 많고 비속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하지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험은 확실히 사람을 익숙하게 하고, 익숙해지면 인간은 쉽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요. 

 

저에게 영어는 정말 큰 산이었습니다. 아직도 정복해야 할 산이긴 하지만요. 예전에 밑에서 올려다보는 그 산은 너무 거대하고  한없이 높아 보였지만,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다 보니, 안내판도 보이고 같이 올라가는 사람들도 보이고, 때론 저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비록 아직 정상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 예전만큼 거대해 보이진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꾸준히 걸어온 그 길고 긴 길에 뿌듯함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우리가 마주 보는 두려움은 원래 그 실체보다,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이미지가 우리를 더 두렵게 만들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시작하시던, 또 어떤 두려움 앞에 서 계시든 간에 그 일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꾸준히 포기하지 말고  올라가 보세요. 처음엔 힘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겠지만, 어느새인가 익숙해진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언젠간 그 산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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