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사촌동생들과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자르고 만들면서 놀았고, 제일 좋아한 시간은 미술시간이었습니다. 또 친구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거의 그림을 그려서 카드를 만들어 주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엔 무서운 부모님께 미술학원 보내달라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가서도 미술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예고등학교라는 것을 듣고 거기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생에 처음으로 큰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미술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친척의 말만 듣고 단칼이 거부하셨습니다. 예술은 머리에 똥이나 든 아이들이 하는 거라면서요. 그러나 그때 "그래? 너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한번 가지고 와봐라"라고 말씀만 해주셨어도 어린 시절 그렇게 상처 받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거절과 거부보다는, 저에 대한 무관심과 돈걱정에 더 화나고 섭섭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아버지께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 아동학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아동학과로 진학을 한 이유도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유치원 선생님들은 왠지 모르게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많이 할 것 같아 선택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은 정확했습니다. 아동발달, 심리학도 너무 재미있었지만, 정말 수업 발표를 위해 육아 교구도 참 많이 만들어야 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재미있게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특수교육을 배우겠노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러나 영어라는 어마어마한 언어장벽에 소심한 겁쟁이였던 전, 좌절을 하고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곤 남편과 결혼을 했네요.
늘 그림은 마음속에 숨겨놓은 열정이고 사랑이었는데,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생으로 낳고 죽다가 살아온 경험 해서 그런 걸까요?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만 26살이었던 전, 그때가 제 인생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부모님의 동의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요. 남편은 취미로 하다 말겠지 하고 호기롭게 동의를 해 주었고 집 근처 전문대학에 가서 첫 드로잉 수업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미술학원 한번 다녀보지 못한, 어쩌면 미술에 대해 너무 문외한이었던 전 너무 떨렸지만 너무 기분 좋은 흥분이었던 첫 수업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미국의 전문대학에선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완전초보들을 위한 미술수업도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미술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하면 할수록 너무 재미있고 잘하고 싶은 용기가 뿜뿜 생겼습니다. 거기다 워낙에 칭찬에 후한 미국 선생님의 칭찬과 관심도 듬뿍 받으니 더 잘하고 싶어 졌죠. 그게 계기가 되어 완전히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그림을 배워서 무엇인가 되겠다는 욕심도 없었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사실 없었습니다. 디자인도 아닌 순수미술을 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말 미술 선생님밖엔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땐 그림을 배우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쭉 학교를 다녔네요. 그 공부가 거의 10년이 될 줄은 남편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그리고 그림을 점점 배우면서 인물/초상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때도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안과 밖으로 사람에 대해 많이 공부한 사람이 되었네요.) 그 당시 사람의 인체와 얼굴을 정말 잘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미술 대학원으로 갈땐 인물 페인팅을 중점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미술학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인물/초상화입니다. 그래서 드로잉을 할 때도 인물 페인팅이 가장 마지막 학년에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흔히를 복잡한 건물이나 사물 등을 그리는 것이 사람보다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시자만, 진실은 반대입니다.
사물이나 건물, 풍경등은 디테일이 좀 없어도 그냥 그 사물 같고 건물 같아 보입니다. 자동차에 손잡이를 좀 작게 그린다고 자동차 같아 보지 않거나 복잡한 빌딩에서 창문 몇 개 뺀다고 건물 자체가 이상해 보이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신체의 크기가 조금만 작아지거나 커져도, 혹은 정말 작은 눈썹 하나만 이상하게 그려도 사람 같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정말 너무나 쉽게 원숭이나 외계인 모습으로 변하지요.^^ 거기나 인물의 포즈를 좀만 잘못 그려도 뼈가 없는 오징어나 아니며 뼈가 한 군데 꺾여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물 드로잉과 페인팅은 정물, 풍경이 모두 마스터가 되면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끼리도 인물화를 잘 그리면 다 잘 그리는 사람이라 인정을 해줍니다. 그래서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인물/초상화까지 마스터하느라 저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뭐든 꾸준히 노력하면 실력이 는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힘든 줄도 모른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그림을 배울 땐 6-8시간 수업을 받고 와도 생글생글 웃고 다녔는데 상담 대학원을 다닐 땐 매일매일 죽상이라, 남편이 상담 공부 그만두고 다시 그림이나 배우라며 말하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팬데믹을 시작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심리상담 박사과정이라도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시간이 잠시 있었습니다. 책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수업도 다 온라인이라 지금 시기에 배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 말년에 무엇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가장 잘하고 싶은 지도 생각했습니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 글 쓰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도 늘 가장 잘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은 그림이었습니다.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보다 그림을 그리는 그림쟁이로 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그림작가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제 사랑은 그림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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