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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소소한 일상

(심리상담/소소한 일상) 상처받은 어린아이, 엄마가 되고 치료사가 되다.

by art therapist (아트) 2020. 7. 22.

 

 

 

 

만 25살에 결혼하고 26살에 큰 딸을 낳고 엄마가 되었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이제 나는 성인이고 믿음의 자녀이니, 나의 아픈 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집은 남들 보기엔 너무나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정이었다. 가정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술이니 바람 노름. 이런 것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집이었다. 그냥 부부싸움과 고부 갈등이 잦고 엄한 부모님이라는 정도. 그러니 어디 가서 상처니 아픔이니 말하는 것도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상처나 아픔쯤은 별것 아니라며, 그리고 나는 이제 믿음의 가정에 믿음의 남편을 만났으니 나는 자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 너무나도 순진했던 나 ㅜ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진 나는 독신주의자였다. 그때까지 내 눈에 비췬 주변의 결혼생활은, 여자들에게 너무나 불공평해 보였고 하나같이 불행해 보였다. 나도 행복한 가정을 꾸려보고 싶다는 소원은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런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는 간절한 내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행복한 가정!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부터, 나의 실체를 서로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부족하고 아픈 곳을 서로 보듬에 주고 도우며 살라고 만드신 공동체이다. 그 부딪힘과 단련 가운데 정말로 하나 되는 연합과 성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나의 껍데기를 버리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결단과 헌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살면서 나의 실체를 제대로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중에 공부하고 알았다.

 

웬만하면 상대방을 먼저 배려했고,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성실했으며,누군가와 싸워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아빠와 오빠 빼고) 때론, 화나면 입을 다물었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슬프면 울다가 잠들었으며, 누군가가 미워지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떠났을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와 언쟁을 할 일도, 싸울 일도 없었고..

나는 스스로 참 무던하고 단단하고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일은

어쩌면.. 나의 과거의 상처와 날마다 대면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 가운데서 진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참 많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내 존재도 주변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과 성과물로 판단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러셨던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항상 갈구했다는 것을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부딪히면서 알았다. 

 

그리고 미국에 오고 나서야 우리 가정은 남들보다 50-100년은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다는 걸 알았고.

상담 공부를 하고 나서,우리 가족의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6.25 전쟁 때 노래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시던 감수성 풍부하셨던 나의 외할아버지는 고등학생 나이에 군인이 되셨다.(돈이 없어 형이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후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심하게 앓으시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셨다. 가수가 꿈이 셨던 예술가 기질이 풍부하셨던 외할아버지에게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총에 맞는 경험들은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돈이 없어 못 간 우리 외할머니는 아이 셋과 병든 남편을 데리고 사시느라.. 참 독하게 치열하게 사셨다. 생계가 우선이라 딸들은 모두 방치하시고 또 자신의 삶의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배운 게 없어서, 아이들에게 분풀이도 많이 하셨다. 돈버시느라 세 살도 안된 엄마를 방에 가두고 일을 가셨다는 이야기며, 또 말이 느리다며 꼬챙이로 엄마의 입을 때려 이가 부러졌던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 그런 가정에서 큰딸로 크신 우리 엄마는 도망치듯 21살에 결혼하셨다.부모가 정해준 남자와 3개월 만에. 결혼만 하면 그 지긋지긋했던 불행과 아픔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을 줄 아셨다고 한다. 그러나 친정부모보다 훨씬 매섭고 무서운 시어머니를 만날 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 가랑촌에서부산으로 나름 성공적인 취업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를 끔찍하게, 병적으로 사랑하는 할머니까지 부산에 정착하셨다. 까막눈에, 7자녀 중에 4자녀는 병으로 잃으시고 큰아버지는 아들 없는 큰집에 입양 보내신 할머니는 말 잘 듣는  둘째 아들인 아버지에게 병적으로 집착하셨다. 아들이 말을 안 들어도, 며느리가 말을 안 들어도 목 메달아 죽는시늉을 하는 할머니 밑에서 우리 아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육체는 어른으로 자라셨으나 아버지의 정서는 할머니의 착한 아들, 딱 그 수준에서 멈추셨다. 그리고 그냥 사회적 기능.. 돈 버는 일, 그래서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을 굶기지 않고 살게 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셨던 것 같다.가난만 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 알고.

 

나중에 대학을 가서 아동학과 상담을 배우고 나서야 우리 부모 모두 끔찍한 아동학대/ PTSD 피해 자란 걸 알았고 그런 두 분이서 만나서 가정이 이루었으니..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도 본인들의 고통을 자식들에게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자신들은 방법을 몰랐다고 배고프게만 하지 않고 학교만 보내주면 부모 노릇 다한 거라 생각했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할 말을 잃었다.엄마 아빠도 제대로 된, 건강한 사랑을 받아보신 적이 없으니오빠나 나를 건강하게 사랑했을 리는 없었다. 엄마 아빠의 내면 아이는 여전히 어린이였다.

그런 분들이 아이들을 키웠으니우리를 받아주고 용납하고 사랑으로 키울 수 없었다.

 

나는 어릴 적,엄마 아빠가 우리에게도, 서로에게도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칭찬하면 버릇 나빠진다며 칭찬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여자로 태어난 것도 나에겐 죄였고 할머니의 한숨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성별이나 외모로 나는 늘 비교와 차별을 당했다. 오빠처럼 똘똘하지 못한 것도, 내가 아빠 닮은 것도 할머니에겐 미움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 기억에서 사라진 건지 아님너무 공포스러워서 내가 억지로 지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오빠의 기억에 남아있는 대문 밖으로 여러 번 쫓겨났던 것들. 겁이 많아 잘 울고 고집 피우면.. 어김없이 날아왔던 몽둥이들."밖에 나가 부모 얼굴에 똥칠하지 마라.. 네가 저지른 일은 니가 책임져라.."며 냉정하게 선을 그으시던 말들..

"네가 하면 얼마나 잘하냐..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며 쏟아붓는 비난과 비교. 정말 정말 고민하고, 용기 내서 미술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 나에게 기회 한번 줘보지도 않고 일언지하 "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하냐, 미술은 머리가 깡통인 애들이나 하는 거다라고" 거절하던 일...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제일 싫었던 건, 끊이지 않던 엄마 아빠의 싸움과 고부간의 갈등 끝에, 엄마는 항상 " 엄마가 없어지면 그냥 간 줄 알아라.. 찾지 마라.. 엄마는 아빠랑 더 이상 못 산다" " 너 네 때문이 엄마가 이 집에서 산다.. 너 네 없었으면 엄마는 벌써 갔다" 이런 말들이었다. 엄마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나와 오빠가 족쇄인 것 같아 어린 나는 늘 엄마에게 죄책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부갈등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빠가 참 미웠다. 아니 그 중심에서 번번이 우리가, 아닌 할머니를 선택하는 아빠가 밉고 싫었다. 이럴 거면 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는지.

 

그렇게 부모님의 매서운 말들과 엄포, 협박들은 나중에 공부하고 나서, 심리적으로 겁 많고 소심한 개들이 더 많이 짖고 달려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너무 황당했다. 엄마 아빠의 불안과 걱정을 푸는 방법이 고작그렇게 우리에게 겁주고 협박하는거였다는 것을 알고 너무 억울했다. 

 

내가 그 말에 얼마나 아팠는데...

내가 그 말에 얼마나 서러웠는데...

내가 그말에 얼마나 죽고 싶었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빠도 참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돈 버는 일이  세상에서 최고인 아버지에게 글을 쓰는 작가니 소설가는 말도 안 되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돈이 전부라 여겼던 아빠에게 오빠는 골치거리고 한숨이었다.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끝이지 않는 고부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오빠도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으나 자신 때문에 싸우는 엄마와 할머니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초등학교 3-4년밖에 되지 않았던 꼬마가 고부갈등 끝에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온 엄마를 화해시켜보겠다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던 것을. 그나마 나는 엄마 아빠 헤어지면(솔직히 그땐 엄마가 헤어졌으면 했다.그냥 엄마랑 둘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살아도 이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미련 없이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오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나도 너무 어려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가 헤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겁이 나면 자기라도 나서서 화해를 시켜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는지 지금 그 꼬마를 지금 꼭 안아주고 싶다. 니 잘못이 아니라고. 그래서 오빠도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그게 어쩌면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말해주고 싶다. 이제 부모의 불행은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제 너의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힘들 날도 많았지만 가끔은 웃는 날도 있었고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녔다. 남들처럼 화려하진 않더라도 집도 있었고.. 내방도 있었고.. 배도 고프지도 않았고.. 학교도 다녔다.

 

그러나 나는 늘 불안했다.

엄마가 언제 떠날까 불안했고..

엄마 없는 집에 할머니랑 둘이 남을게 너무 끔찍했고..

내 존재가 엄마 아빠 기준에 한참 미달인 것이 너무 한심했고

혹여 내가 뭔가 잘못해서 쫓겨날까 봐.. 늘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순해지고 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30-40대 우리 엄마는 늘 신경이 예민했고 아빠는 늘 무심하고 바쁘셨다. 엄마는 자주 우울했고 자주 아프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너무 억울한 일이 많았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빠를 돕느라 밤이며 낮이며 힘든 비닐을 때우고 포장하는 일을 하셨고,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르느라 엄마의 어깨는 기어이 망가지고 말았다.  아빠 장사 때문에 집에 데리고 있던 시댁 쪽 먼 조카들이 항상 우리 집에 2-3명씩 거주했다. 그 식구들 빨래며 밥까지 다 엄마 몫이었다. 그 와중에 일 년에 치르는 제사만 12-13번. 주말엔 아버지 쪽 친척들이 오면 집에 항상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여기다가 할머니가 수틀리면 말도 안 되는 생떼와 어깃장을 다 온몸으로 받으셔야 했다. (얼마나 할머니의 목청이 컸으면 그 목소리가 집 담장을 넘어 온 동네에 퍼저, 동네에서도 호랑이 할머니로 유명하셨다. )

 

그래서 나는 알고 있었다.

나라도 이 집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기서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간 정말 엄마가 집을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본능적으로 순하고 착하게 컸다.

 

물론 늘 집에 대한 불안으로 학교 공부는 집중할 수 없어서 공부는 잘하진 못했지만 엄마 아빠에게 짐에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내가 우리 부모에게 짐이 되는 순간 버려질 거라 생각했다. 나는 부모도 전적으로 믿지 못했고, 다른 사람은 더더욱 믿지 못했다. 그래서 더 독립적으로 살았고 생존해야 했다. 소위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부모님은.. 어른들은.. 그렇게 일찍 어른이 된 나를 좋아했다. 나는 그래서 그게 맞는 줄 알았고 잘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그냥 어른 행세를 하고 살았을 뿐이었지 나 또한 감정적으로 성장하지도 성숙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채로 결혼을 했다. 몸이 컸으니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한 채로.. 엄마가 되었다.아동학도 공부하고 관련 책도 많이 읽었으니 나는 우리 부모랑 다르게 살 것이라 확신했고 그렇게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지식으로 안다고.. 책으로 읽는다고 내 마음이 성장하진 않더라.

 

매일 아침 머리로 다짐하고 마음먹은 것은 그날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엄마 아빠를 머리로는  이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아팠다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소리치는 나에게 여전히 돌아가신 지가 20년이 넘은 할머니의 착한 아들 수준인 아버지는 나에게 진정한 어른, 아버지가 못되셨다.

 

다행히 엄마는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니시고 당신의 평생의 한이였던 공부를 시작하시고 사회복지를 배우시면서 우리에게 참 미안해하신다. 자신이 너무 많은 잘못을 했다고. 나는 엄마의 진심 어린 사과가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묵혀있던 상처와 감정들이 아이들과 부딪히며 만날 때마다 너무 괴로웠다. 특히 아이들이 커가면서 나도 모르게 흡수한, 내가 그렇게도 경멸하고 싫어하던 부모님의 사고방식과 말투가 내 안에 남아있는 것과  나도 모르게 나의 어린 시절의 분노와 억울함을 아이들과 남편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절망했다. 늘 내가 왜 이러나.. 미쳤나 싶다가도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받은 아픔을 아이들에게 분풀이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엄마 아빠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 지긋지긋한 과거는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울부짓은 날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 꺼풀 벗겨지면 끝인가 싶다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올라올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다 놓아버리고.. 나도 내가 본 대로 익숙한 데로 당한 데로 맘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그럴 때마다.. 혹여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나와 같은 모습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면,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에게서 멈춰야 한다.." 이 고통을 또 우리 아이들에게 되풀이하게 해서는 안된다..

완벽한 부모는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처럼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녀로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나의 상처를 열어야 했고 헤집어 파고 치료하고 꼬매고 묶어야 했다. 너무 아팠다.. 나의 연약한 실체를 보고 있는 것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이것 때문에 흘린 눈물만 몇 바가지는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몇 바가지 더 흘려야 할걸 알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렇게 해야 내가 달라졌다. 내 눈빛이 달라졌고 내 말투가 달라졌다. 내가 달라지니 아이들과 관계가 달라졌다.

 

이렇게 달라진 지 고작 4-5년째다. 세 아이를 키우고 나서 이제야 나는 엄마 같다. 큰아이를 키울 때 내 나름대로 정말 잘 키워보려고 정말 노력했지만, 나는 정서적으로 참 무디고 어린 엄마였다. 나의 내면의 아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아이가 어릴 땐 몸은 힘들어도 너무 재미있고 행복했다. 잘 먹이고 놀아주고 건강하게 키우는 건 힘들지 않았다. 내가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넘치게 주겠노라 다짐했고 또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아이가 커 갈수록 그 아이의 자아가 자랄수록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나와 다른 아이의 성향과 기질을 받아주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습관 데로 나오는 말투와 태도.. 냉정한 평가가 큰 아이를 참 힘들게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큰애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 이후 틈나는 대로 용서를 구하고 우리는 회복하고 있다. 회복하는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내 내면의 아이가 자랄수록 내가 이제야 엄마다워지고 어른다워진 걸 느낀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나의 실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아픔의 과정을 통해서 그 내면의 성장이 멈춘 아이는  참 많이 컸다. 그리고 아직 많이 더 커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러나 그 과정이 아프다고.. 더 이상 도망가거나 피하진 않는다. 나를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나의 결핍과 상처가 나를 치료사, 상담사로 만들었다. 주변에 우리 부모님과 같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아픔과 상처를 그냥 외면하고 무덤덤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고,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했다. 물론 나 한 사람의 영향력은 너무 미미 하다는 걸 안다. 엄청난 사명감과 포부를 가지고 치료사 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이들을 만나고, 부모들을 만나면서 만날수록, 나의 노력은 지극히 보잘것없다는 걸 번번이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길을 가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단 한 아이라도..

나의 경험과 나눔이 그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도 더 나은 선택과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 생각에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가정의 불우한 가정사와 나의 실패를 까발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이 나에게 치료의 효과를 준다. 고백과 표현은 썩어지고 문 들어진 상처에 햇빛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더 이상 냄새나거나 아프진 않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 이야기엔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인생에서 숨기고 싶고, 부끄러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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